2012년 6월 19일 화요일

_ n o t h i n g

야간 자전거 타러 나가기 전 내가 좋아라하는 구절을 읽어본다 .
 
학창시정때 읽었을때랑 지금이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
 
이 구절은 몇 달 전에도 봤었다.
 
그리고 지금 또   ...........
 
 
 
<< 만약 우리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수없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이 영원에 못박힌 꼴이 된다.너무나도 무서운 생각이다. 영원한 재귀의 세계에서는 모든 동작에 견디어낼 수 없는 무거운 책임의 짐이 지워져 있다.이러한 근거에서 니체는 영원한 재귀의 생각을 [가장 무거운 무게]라 일컬었다. 만약 영원한 재귀가 가장 무거운 무게라면 우리들의 삶은 이 배경 앞에서 아주 가벼운 것으로 찬란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정말 무겁고 , 가벼운 것은 찬란한가?
가장 무거운 무게는 우리를 짓눌러 우리를 압사케 한다. 우리를 땅바닥에 압착시킨다.하지만 어느 시대나 사랑의 서정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육중한 무게를 동경한다. 따라서 가장 무거운 무게는 동시에 가장 집약적인 삶의 충족 이미지다.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땅에 가깝다. 그것은 더욱더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무게가 전혀 없을 때 그것은 인간이 공기보다도 더 가볍게 되어 둥둥 떠올라 땅으로부터,세속의 존재로부터 멀리 떠나게 한다.그래서 인간은 절반만 실제적이고, 그의 동작은 자유롭고 동시에 무의미한 것이 된다.
자. 그러니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무거운 것을? 아니면 가벼운 것을 ?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온세계가 여러 대립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보았다.빛-어둠,섬세-난삽,따뜻함-차가움,존재-비존재등 . 그는 한쪽 극 (빛,섬세,따뜻함,존재)을 양으로, 다른 극을 음으로 생각한다.그와 같은 분할은 너무나 쉽게 보이지만 한가지 어려움을 동반한다.즉 , 어떤 것이 양이냐 하는 것이다. 무거운 것이? 아니면 가벼운 것이?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은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 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나는 토마스를 생각해 왔다.그러나 이 같은 철학적 숙고의 조명 아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를 명백히 내 앞에 보게 되었다.그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안마당 건너, 건너편 거주구획의 담벽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그는 약3주 전에 테레사를 보헤미안 지방의 시골도시에서 알게되었다. 그들은 겨우 한시간 동안 함께 보냈다. 그녀는 정거장까지 전성하여 그가 기차에 올라타기까지 기다렸다.열흘 후 그녀는 프라하에 있는 그를 찾아왔다. 바로 그날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그날 밤 그녀는 몸에 열이 났다.그리고 그녀는 독감으로 일주일 내내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때 그는 거의 알지 못했던 이 처녀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그에게는 그녀가 마치 어느 누가 까맣게 콜타르를 칠한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버린 아기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이 아기를 자기 침대의 강둑에서 구조하도록 말이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건강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프라하에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그녀의 시골도시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제 내가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그 순간이 이어진다. 바로 나는  토마스의 삶을 열어줄 열쇠를 본다.토마스는 창가에 서서 안마당 너머 건너편에 있는 거주구획의 담벽을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한다.
그녀를 영원히 프라하로 데려올 것인가? 그가 그녀를 초청한다면 그녀는 자기의 온 삶을 그에게 바치기 위해 올 것이다.
아니면 그녀애개 자신의 소식을 더 이상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테레사가 쓸쓸한 시골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머물고, 그가 그녀를 다시는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가 그에게 오기를 그는 원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는 안마당 너머 건너편 담벽을 바라보며 대답을 구한다.
계속 그에게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그녀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의 기억으로는 어느 누구와ㅏ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연인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까맣게 콜타르 칠을 한 광주리에서 주워올려 자기 침대의 강둑에 내려놓은 아이였다.그녀는 잠이 들었다. 그는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열기 있는 그녀의 호흡은 보다 빨라졌다. 그리고 그는 약한 신음소리를 들었다.그는 자기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대고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얼마 후 그는 그녀의 숨결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을 향해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열기의 씁쓸한 냄새를 느꼈다.마치 그녀 육체의 친밀감을 완전히 빨아들이려는 듯 오는 이 냄새를 들이켰다.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의 곁에 있었고 이제 임종의 자리에 누워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갑자기 그는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 곁에 누워 그녀와 함께 죽고싶있다. 그는 얼굴을 그녀 머리 옆 베개에 묻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이런 자세를 머물렀다.
이제 그는 창가에 서서 바로 그 순간을 생각한다.그것이 이런식으로 그에게 나타났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가?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던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었던 느낌은 명백히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자기 삶에서 겨우 막 두번째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히스테리가 아니었던거?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자기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도 자신을 속여 이것이 사랑임을 믿도록 하기 시작한 인간의 히스테리 말이다. 이때 그의 잠재의식은 너무도 비겁하여 자기 희극을 위해 근본적으로 자기의 삶에 뛰어들 기회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지방 출신의 이 가련한 식당 종업원을 하필이면 선정했던 것이다!
그는 안마당 너머 더러운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히스테리인가 아니면 사랑인가를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책망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즉각 알았을 상황에서 자기는 주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그는 그녀가 잠자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의의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책망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과 다투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실은 아주 정상적이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할 수도 없다.
테레사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것이 나은 것인지? 어떤 결단이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비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최초로, 준비없이 체험한다.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하지만 삶을 위한 최초의 시연이 이미 삶 자체라면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근거에서 삶은 언제나 스케치와 같다. [스케치] 또한 맞는 말이 아니다. 스케치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초안, 어떤 그림의 준비인 데 반해 우리들 삶의 스케치는 무에 대한 스케치로서 그림 없는 초안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고 토마스는 자신에게 말한다. 여하튼 우리가 단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가 살지 않은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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